물질 특허 등 독점 공세에 국내 업체들 쩔쩔 "미국 정부를 통한 다국적 제약사의 로비 때문에 경질되었다.” 지난 7·11 개각에서 물러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발언은 일파 만파를 몰고 왔다. 미국측이 여러 경로로 여섯 차례에 걸쳐 압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을 김홍신 의원이 공개하면서 로비·압력 의혹은 증폭되었다(42쪽 딸린 기사 참조). 한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압력으로 경질됐든 아니든 간에 이장관의 발언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룡 같은 다국적 제약사의 위세가 일반에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 한겨레신문 지난해 하반기 병원이 청구한 금액이 많은 상위 10개 의약품 중 다국적 제약사 제품이 9개를 차지했다. 현재 국내에는 외국계 제약사가 30여개 진출해 있다. 이 가운데 27개 사가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PI) 회원사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 다국적 제약사들은 의약분업 실시 이후 한국 제약 시장에서 승승장구했다. 1999년 11월 고시가 제도에서 실거래가 상환제로 전환되면서 고가 약품 처방이 상당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처방전이 공개되면서 병원에서는 환자들의 신뢰도가 높은 다국적 제약사들의 고가 오리지널 약품 처방을 늘렸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고가 약품비 비중은 36.24%(2000년 5월)에서 53.17%(2001년 11월)로 급증했다. 지난해 하반기 병원이 청구한 의약품 1만5천개 가운데 청구 금액이 많은 상위 10개 의약품 중 다국적 제약사 제품이 9개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약으로 대박 터뜨리자” 블록 버스터 전략 다국적 제약사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신약을 개발하고, 신약 하나로 대규모 수익을 거두는 블록버스터 전략을 구사한다. 한국화이자는 지난해 고혈압 치료제인 노바스크 한 제품만으로 9백50억원 매출을 올렸다. 또한 동일 성분이라도 오리지널 약품과 국내 카피 약품의 건강 보험 약가는 최고 23배까지 차이가 난다. 위궤양 치료제인 잔탁의 보험 약가는 5백6원인데 비해 아주약품에서 나오는 카피 약품인 라티콘 정은 49원이다. 오리지널 약품과 카피 약품의 보험 약가가 200% 이상 차이가 나는 품목은 현재 66개에 이른다. 다국적 제약사에 비해 국내 제약회사는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최초로 신약을 개발했던 인트젠 김대기 박사는 국내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 인프라가 매우 부족하다고 말한다. 신물질 합성 능력은 세계 수준에 근접했지만 임상 실험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설명이다. “몇천 명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3상에 연구개발비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마땅히 임상 실험을 할 곳도 없고, 한국에서 임상 실험을 해서는 외국에서 인정받지도 못한다. 그래서 중간에 기술을 외국에 넘기고 로열티를 받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약과 동일한 성분이지만 제조 방법만 다른 카피약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물질 특허와 함께 동일 성분 약을 생산할 수 있는 ‘우회’ 방법에 대해서도 특허를 걸어놓기 때문에 특허와 관련해 송사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이다. 종근당에서는 장기 이식 면역 억제제인 사이폴엔을 만들었다가 다국적 제약사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노바티스는 종근당이 자사의 산디문 네오랄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1999년 8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걸리자 외국 바이어들은 소송 중인 약품이라는 이유로 수입을 꺼려했다. 제조 기술을 둘러싸고 법적 공방이 오간 끝에 2001년 12월 종근당은 1심에서 승소했다. 현재 이 재판은 노바티스가 항고해 2심이 진행되고 있다. 종근당 관계자는 “이번 승소는 다국적 제약사의 무분별한 특허 소송에 제동을 건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 결과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보령제약은 지난 4월11일 특허심판원에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를 상대로 노바스크 물질 특허에 대해 국내에서 최초로 통상실시권허여심판을 청구했다. 선행특허권자가 실시권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국가의 심판을 통해 일정 로열티를 지불하면서 실시권을 확보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 노바스크는 2010년까지 물질 특허가 되어 있어 만료 시점까지는 독점이 보장되어 있다. 새로운 제조 방법을 개발한 보령제약은 물질 특허에 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새로운 공정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화이자에 두 차례 요청했다. 화이자에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나타냈다. 보령제약은 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보령제약 관계자는 “물질 특허 자체는 존중한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의약품 독점이 지속되면 의약품 그 자체가 무기화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들이 노력 끝에 신물질을 개발해 외국에 기술을 팔았다 하더라도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일부 다국적 업체들은 경쟁이 될 만한 소지가 있는 신물질을 기술 제휴라는 이름으로 사들인 뒤 사장시킨다고 그는 말했다.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이런 상태라면 2백50여개 국내 제약회사는 5년 내에 40∼50개로 정리될 것이다. 제약 식민지가 따로 없다”라고 이 관계자는 푸념했다.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